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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초등 3,4학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아빠가 남긴 것 (캐럴 캐릭, 베틀북)>이란 책을 읽고 나눈 대화의 한 장면입니다.
“이 책 어땠어? 재밌었어?”
“네. 그런데, 너무 슬펐어요.”
“어디가 그리 슬펐니?”
“자기 아빠 옛날 자랑을 할 때, 또 안 울려고 일부러 발장난하고 딴 짓 할 때. 맞다, 빨간 스웨터 보고 아빠 생각할 때 너무 슬펐어요.”
“너는 아빠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니?”
“…….”
“예전에 불만이 많다고 했잖아.”
“아니에요. 이제 없어요. 아니, 조금 있기는 한데, 괜찮아요.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요.”
“어, 지난 번 얘기와 너무 다르잖아.”
“아니에요. 아빠가 있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해요.”
“그러면 아빠에게 편지를 한번 써보자.”
“네, 좋아요.”
아주 이상적인 대화 장면입니다. 아마 독서 지도 매뉴얼이 있었다면 위와 같았을 겁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아이와 얘길 해보면 저렇게 문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특히 집에서 엄마와 아이 사이에는 저런 대화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책을 읽고 나면 저 정도의 대화는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위와 같은 대화가 될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대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엄마의 ‘불순한 목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책 읽어주기 또는 거창하게 ‘독서지도’라고 해서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엄마가 평소 수다를 떨듯이 얘기하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격식’입니다. 격식을 차리지 마세요. 마치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냥 편하게 읽되, 중간 중간 엄마의 느낌을 그냥 말하세요. 아이에게 묻는 게 아니라, 그냥 중얼거리듯 엄마의 느낌을 그냥 말하세요. 엄마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전달하세요. 엄마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혀 말하지 않고서 아이에게만 질문하려는 생각을 버리세요. 엄마의 마음속 생각을 충분히 들어본 아이는 자신의 맘속 얘기도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나쁜 어린이표>를 읽을 땐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아~ 화분이 깨졌네. 속상하겠다.” (주인공 건우의 마음을 공감합니다.)
“어, 하필이면 벌써 종이 울렸담, 나쁜 어린이표를 또 받겠구먼” (엄마 혼자 중얼거립니다.)
“어, 그런데 두 개를 받았네. 뭐야, 그럼 벌써 3개잖아. 학교에 남아야겠네.” (계속 중얼거립니다.)
“얘는 왜 자꾸 나쁜 어린이표만 받을까, 나쁜 어린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엄마의 독백)
(건우가 자기 이름에 노란색 스티커가 많은 것을 보는 장면에서)
“기분이 정말 좋지 않겠다. 일부러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정말 억울하겠다. 그치?”
최대한 엄마가 읽으며 혼자서 느낌을 말하다가 몇몇 부분에서 아이에게 동의를 구해보세요. “그렇지 않니?” “그렇지?”와 같이 가볍게 동의를 구하는 질문을 먼저 해보세요. 아이는 큰 부담 없이 “응.” “나도 그래.”와 같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네 생각은 어떠니?”와 같이 주관식을 요구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처음 시작한다면 당분간 아이에게 가볍게 동의를 구하는 수준 정도의 질문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며칠 정도 익숙해지면, 아이는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의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 조금 발전된 대화가 가능합니다.
“앗, 선생님한테 들켰다. 어떡하지?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왔을까, 아니면 계속 숨어 있었을까?”
“선생님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네. 선생님이 어떤 분 같아?”
이런 식의 대화도 가능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책을 다 덮고 난 다음에 위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엄마의 느낌을 계속 표현하는 과정에서 대화하듯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무리 혼자서 떠들고 독백하면서 ‘네, 아니오’만 묻는 단답식 질문을 해도, 전혀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 아이가 보기에는 엄마의 불순함이 남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아이의 마음에 엄마의 불순한 때가 사라질 때까지 한 권, 두 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계속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아이의 말문이 터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후에라야 독서 지도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사용 가능합니다.
설사 아이가 대답을 잘 하지 않더라도 낙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아이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도 중간 중간 읽으며 질문을 시도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질문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더라도 머릿속에는 이미 자극을 받아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질문을 했는데 아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너무 기다리지 말고 그냥 넘어가세요. 아이의 머리는 이미 자극을 받은 상태입니다.
중간 중간 자극을 받으며 책을 읽는 것은 ‘생각하며 읽기’의 과정입니다. 아무런 자극 없이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느낌을 전해 듣고, 나의 느낌은 어떠한지 단 몇 초라도 고민하고, 앞으로의 과정은 어떻게 될 지 잠깐이라도 추론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하며 읽는’ 연습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며 읽기’, 즉 정독을 위해 ‘생각하며 듣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생각하며 듣기에 익숙한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읽을 때도 생각하며 읽을 수 있습니다. 정독습관은 누군가 억지로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되듯 나도 모르게 드는 습관입니다. 엄마의 ‘입버릇’이 아이의 ‘생각버릇’이 됩니다.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하고,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고, 의심하고, 기뻐하고, 감탄하는 엄마의 입버릇이 아이의 생각버릇이 됩니다. 생각하며 책을 읽는 아이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