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16.끝] 비록 점쟁이들은 외면했지만
Posted on : 2006-09-26 | By : SON BYOUNGMOK | In : 동양고전 이야기, 손병목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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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
지금까지 《주역》을 읽기 위한 아주 기초가 되는 지식들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주역》에 대한 저의 이야기는 마칠까합니다. 《주역》으로 점을 제대로 치는 방법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던 분이라면 실망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점치는 방법은 그 형식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동전을 던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설명 드릴 것도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도리를 다하고, 도저히 결정하기 힘든 두 가지 선택을 두고 치는 것이 점이니 그 형식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문제는 그 선택을 믿고 따르는 마음가짐에 있겠지요.
참고로 저는 아직 점을 치지 않습니다. 나의 바람과 반대되는 점괘가 나왔을 때 그 점괘를 순수하게 믿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내가 바라는 것을 내 의지로 만들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어떠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니, 언젠가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점을 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점치는 행위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던진 동전이, 아무렇게나 뽑은 산가지가 내 인생의 결정적 선택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은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점괘는 그 자체로 우연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깊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말한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실제 벌어지는 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관계에 대해 융은 원인과 결과를 뚜렷이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융은 이것을 ‘싱크로니시티’라고 불렀습니다. 우연히 같은 의미를 가진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 바로 싱크로니시티입니다. 이를테면 점괘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렇게나 던진 동전, 그리고 그 결과인 점괘, 그 점괘에 해당되는 《주역》의 괘를 찾아 읽는 순간, ‘맞아, 바로 이것이었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점괘의 일치, 이것이 싱크로니시티입니다. 이제 그 선택은 확신이 되어 나의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갈등은 사라지고 확신에 따른 행동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융은 점성술과 초능력 따위를 믿었나 봅니다. 그의 동료인 프로이트가 꿈을 해몽하고자 노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점쟁이들은 외면했지만
《주역》은 비록 주술신앙에서 출발하였지만 자연철학과 실천도덕까지 포함한 독특한 성격의 철학서이자 수양서이자 처세술을 다룬 책입니다. 점술서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여 일선 현장의 점쟁이들이 잘 활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점을 보려면 점책을, 사주를 보려면 사주책을 보는 것이 훨씬 편리합니다.
《주역》은 우주의 변화, 삶의 변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얻는 피흉취길(避凶取吉)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한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인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면서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내용입니다. 점을 보고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근신하고 대처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결코 변하지 않는 운명 따위는 말하지 않습니다. 우주 변화의 원리와 살아가는 이치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가는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주역》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지식과 경험에 따라 괘를 해석하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주역》은 평생을 두고 생각해야할 화두집입니다. 《주역》 책 한 권 달랑 읽고 점집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평생 동안 《주역》을 공부하고도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산 선생이 있고, 난괘|難卦| 중의 난괘인 산지박괘에서조차 희망을 발견한 신영복 선생 같은 분도 있습니다.
우리시대 최고의 수상록이라 할 수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선생은 정년 퇴임사에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말했습니다. 씨 과실은 먹지 않고 후손을 위해 남겨둔다는 뜻입니다. 《주역》 산지박괘에 나오는 말입니다. 산지박괘는 《주역》의 가장 안 좋은 괘 중의 하나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칠판에 직접 감나무와 하나 남은 감을 그린 뒤,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지만,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하나는 희망”이라며 “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져 거름이 될 때 희망이 싹튼다”고 말했습니다. 《주역》에 담긴 고난의 괘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읽었던 것입니다.
50년 넘게 《주역》을 공부하고 강의하신 대산 김석진 선생은 그의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점괘가 어떻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미래를 알면 뭐해요 죽는 걸. 그렇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점을 보고 나쁜 운명이라면 근신하고 대처해서 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의 점괘를 자주 보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점괘를 보면 나쁜 괘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나쁘게 나와도 좋게 해석하려 합니다. 결국 틀리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주역에서 올바른 예측을 하려면 주역 지식뿐만 아니라 수양이 필요한 겁니다. 결국 수양입니다.”
점술서로 출발한 《주역》이 지금의 점쟁이들에게는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곁에서 깊이 있는 삶을 위한 화두로 살아있습니다.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하며 읽었던 것이 《주역》입니다. 바쁜 세상에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지는 못하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정독하면 좋겠습니다. 《주역》에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꼭 필요한 지혜입니다.
<주역> 연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우선 상생 관계를 보자면, 물이 있어야 나무가 자라니 물은 나무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를 수생목|水生木|이라고 합니다. 나무를 태워 불을 만드니 이를 목생화|木生火|라고 합니다. 예전에 화전을 일굴 때 불을 태워 밭을 만들었으니, 화생토|火生土|라고 합니다. 아니면 지구가 오래 전에 불덩어리였다가 흙이 되었던 것을 알고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흙에서 쇠를 얻었으니 토생금|土生金|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쇠 표면에 물이 맺힙니다. 쇠가 물을 낳는 것이죠. 이를 금생수|金生水|라고 합니다. 공기 속의 수증기가 차가워져 금속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현상을 몰라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해는 밝은 낮을 주관하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고, 달은 어두운 밤을 주관하는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어느 날 해와 달이 만나 다섯 개의 별을 낳았는데, 이들 이름이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입니다. 화성은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수성은 조용한 어머니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목성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금성은 아버지를 좀 더 많이 닮았습니다. 막내인 토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정확하게 반반씩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어 3이 된다는 것은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3이라는 숫자는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3의 개념을 파악했을 것입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물인 하늘과 땅에 인간을 참여시킨 개념입니다.
부여 금와왕의 큰아들 대소를 포함해 일곱 왕자와 신하들의 시기를 받던 주몽이 화를 피해 남쪽 졸본부여 땅으로 내려와 그곳 왕의 딸이었던 소서노와 결혼하여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이때 그를 따라와 건국을 도운 사람은 오리, 마리, 협부 등 세 사람이었습니다. 

괘는 문자가 있기 전에 만들어진 기호입니다. 양과 음을 나타내는 기호를 겹쳐 괘를 만들었습니다. 전설의 인물인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문자가 생긴 이후에 그 괘를 문자로 설명한 것이 괘사입니다. 나중에 그 괘를 뜯어서 육효 하나하나를 설명한 것이 효사입니다. 여기에 철학적 성격이 농후한 십익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를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왕필, 정이천, 주자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역>은 발전되고 또는 덧칠되었습니다. 

태극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은 송대에 이르러서야 체계화됩니다. 송대의 유학자 주렴계(1,017~1,013)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 곧 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말했습니다. 무극과 태극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무극이 곧 태극이라는 뜻입니다. 무극은 끝도 없고 중심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둥근 원 그 자체입니다. 숫자로 표현하자면 0에 해당됩니다. 이에 반해 태극은 둥근 원에 처음과 끝을 나타내는 선이 하나 그어져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선을 좌우로 해서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이 생기는데, 이는 곧 태극에서 음양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극을 숫자로 나타내면 2가 만들어지기 전의 1의 상태입니다.
음양이 바로 그러합니다. 음양|陰陽|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두 글 자 모두 좌측에 언덕 부가 있습니다. 언덕을 기준으로 햇빛이 비치는 곳이 양이고 그렇지 않은 곳이 음입니다. 햇빛이 비치는 곳이 있으니 비치지 않는 곳이 있는 법입니다. 남녀, 상하, 일월, 천지, 좌우 등의 개념도 대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반대 개념들 뿐만 아니라 대대|待對|의 관계에 있는 모든 것을 일컬어 음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주역>에서는 음효(- -)와 양효(一)의 기호로 표시한 것입니다.
몇 개의 아포리아가 있는데, 그 중에 ‘날아가는 화살 아포리아’를 살펴보죠.
햇볕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모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日이 해이고, 勿은 햇살이 비치는 모양입니다. 흐렸다가 개였다가 자주 반복되니까 ‘변하다’는 뜻이 생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