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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16.끝] 비록 점쟁이들은 외면했지만

    Posted on : 2006-09-26 | By : SON BYOUNGMOK | In : 동양고전 이야기, 손병목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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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

    지금까지 《주역》을 읽기 위한 아주 기초가 되는 지식들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주역》에 대한 저의 이야기는 마칠까합니다. 《주역》으로 점을 제대로 치는 방법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던 분이라면 실망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점치는 방법은 그 형식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동전을 던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설명 드릴 것도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도리를 다하고, 도저히 결정하기 힘든 두 가지 선택을 두고 치는 것이 점이니 그 형식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문제는 그 선택을 믿고 따르는 마음가짐에 있겠지요.

    참고로 저는 아직 점을 치지 않습니다. 나의 바람과 반대되는 점괘가 나왔을 때 그 점괘를 순수하게 믿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내가 바라는 것을 내 의지로 만들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어떠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니, 언젠가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점을 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점치는 행위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던진 동전이, 아무렇게나 뽑은 산가지가 내 인생의 결정적 선택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은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점괘는 그 자체로 우연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깊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말한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실제 벌어지는 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관계에 대해 융은 원인과 결과를 뚜렷이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융은 이것을 ‘싱크로니시티’라고 불렀습니다. 우연히 같은 의미를 가진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 바로 싱크로니시티입니다. 이를테면 점괘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렇게나 던진 동전, 그리고 그 결과인 점괘, 그 점괘에 해당되는 《주역》의 괘를 찾아 읽는 순간, ‘맞아, 바로 이것이었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점괘의 일치, 이것이 싱크로니시티입니다. 이제 그 선택은 확신이 되어 나의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갈등은 사라지고 확신에 따른 행동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융은 점성술과 초능력 따위를 믿었나 봅니다. 그의 동료인 프로이트가 꿈을 해몽하고자 노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점쟁이들은 외면했지만

    《주역》은 비록 주술신앙에서 출발하였지만 자연철학과 실천도덕까지 포함한 독특한 성격의 철학서이자 수양서이자 처세술을 다룬 책입니다. 점술서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여 일선 현장의 점쟁이들이 잘 활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점을 보려면 점책을, 사주를 보려면 사주책을 보는 것이 훨씬 편리합니다.

    《주역》은 우주의 변화, 삶의 변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얻는 피흉취길(避凶取吉)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한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인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면서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내용입니다. 점을 보고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근신하고 대처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결코 변하지 않는 운명 따위는 말하지 않습니다. 우주 변화의 원리와 살아가는 이치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가는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주역》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지식과 경험에 따라 괘를 해석하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주역》은 평생을 두고 생각해야할 화두집입니다. 《주역》 책 한 권 달랑 읽고 점집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평생 동안 《주역》을 공부하고도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산 선생이 있고, 난괘|難卦| 중의 난괘인 산지박괘에서조차 희망을 발견한 신영복 선생 같은 분도 있습니다.

    우리시대 최고의 수상록이라 할 수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선생은 정년 퇴임사에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말했습니다. 씨 과실은 먹지 않고 후손을 위해 남겨둔다는 뜻입니다. 《주역》 산지박괘에 나오는 말입니다. 산지박괘는 《주역》의 가장 안 좋은 괘 중의 하나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칠판에 직접 감나무와 하나 남은 감을 그린 뒤,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지만,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하나는 희망”이라며 “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져 거름이 될 때 희망이 싹튼다”고 말했습니다. 《주역》에 담긴 고난의 괘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읽었던 것입니다.

    50년 넘게 《주역》을 공부하고 강의하신 대산 김석진 선생은 그의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점괘가 어떻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미래를 알면 뭐해요 죽는 걸. 그렇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점을 보고 나쁜 운명이라면 근신하고 대처해서 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의 점괘를 자주 보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점괘를 보면 나쁜 괘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나쁘게 나와도 좋게 해석하려 합니다. 결국 틀리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주역에서 올바른 예측을 하려면 주역 지식뿐만 아니라 수양이 필요한 겁니다. 결국 수양입니다.”

    점술서로 출발한 《주역》이 지금의 점쟁이들에게는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곁에서 깊이 있는 삶을 위한 화두로 살아있습니다. 공자가 위편삼절|韋編三絶|하며 읽었던 것이 《주역》입니다. 바쁜 세상에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지는 못하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정독하면 좋겠습니다. 《주역》에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꼭 필요한 지혜입니다.

    <주역> 연재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주역15] 하늘 아래 오행이 아닌 것이 없다

    Posted on : 2006-09-25 | By : SON BYOUNGMOK | In : 동양고전 이야기, 손병목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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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오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주역》과 오행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주역》 어디에도 오행을 언급한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주역》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오행 사상까지 결합한 것 같습니다. 오행의 역사와 그 변천사를 논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양이 될 것 같습니다. 동양의 사상을 두루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으로서의 오행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행은 수, 화, 목, 금, 토입니다. 우리나라 요일 이름이니 따로 욀 필요도 없습니다. 일요일과 월요일은 양과 음을 대표하는 해와 달을 말하고, 나머지 요일이 오행입니다. 오행의 순서는 조금 달리 부를 수 있으나, 오행이 가장 먼저 언급된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순서를 그대로 따르면 수, 화, 목, 금, 토가 됩니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만 따지면, 오행이 음양 개념보다 먼저인 듯합니다.

    <서경>의 <홍범> 편에 오행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홍범|洪範|의 첫째는 오행|五行|이니 수, 화, 목, 금, 토이다.
      물은 아래로 흘러가면서 윤택하게 한다. 짠맛이 난다.
      불은 위로 타오른다. 쓴맛이 난다.
      나무는 굽거나 곧다. 신맛이 난다.
      쇠는 단련하여 모양을 바꿀 수 있다. 매운 맛이 난다.
      흙은 식물을 자라게 한다. 단맛이 난다.

    잘 이해가 안 되죠? 오행과 맛의 연관 관계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옛사람이 아무 뜻도 없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만무하니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뜻을 밝히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물은 계속 아래로 흘러내려가서 결국에는 바다를 만나니 그래서 짜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불이 계속 타서 남은 재는 쓴맛이 납니다. 신맛은 입맛을 돋웁니다. 상큼한 봄, 싱싱한 채소의 푸른 빛, 이런 것은 모두 신맛과 연계됩니다. 따라서 나무와 풀과 같은 식물은 신맛이 난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쇠가 왜 매운지는 저의 상상력으로는 해결하기 힘듭니다. 흙이 달다는 것은 제가 먹어봐서 압니다. 어렸을 때 가끔 마당의 흙을 집어먹은 적이 있는데 의외로 그 끝 맛이 달았습니다. 오행과 맛의 연관관계를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문헌이 없어 제가 좀 억지스럽게 적어봤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묵자|墨子|는 ‘오행 가운데 항상 이기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불은 뜨겁지만 물로 꺼버릴 수 있고, 쇠는 강하지만 불로 녹일 수 있고, 나무도 곧고 딱딱하지만 쇠로 만든 도끼로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물은 아래로 흘러내리지만 흙을 쌓아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행은 서로 생성하거나 막아내는 성질이 있다하여 상생 상극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상생 관계를 보자면, 물이 있어야 나무가 자라니 물은 나무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를 수생목|水生木|이라고 합니다. 나무를 태워 불을 만드니 이를 목생화|木生火|라고 합니다. 예전에 화전을 일굴 때 불을 태워 밭을 만들었으니, 화생토|火生土|라고 합니다. 아니면 지구가 오래 전에 불덩어리였다가 흙이 되었던 것을 알고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흙에서 쇠를 얻었으니 토생금|土生金|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쇠 표면에 물이 맺힙니다. 쇠가 물을 낳는 것이죠. 이를 금생수|金生水|라고 합니다. 공기 속의 수증기가 차가워져 금속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현상을 몰라서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상극 관계로 보면, 나무는 흙을 뚫고 나옵니다. 나무가 흙을 이겼습니다. 이를 목극토|木克土|라고 합니다. 흙은 흐르는 물을 덮어버리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토극수|土克水|입니다. 물은 불을 꺼버리니 수극화|水克火|입니다. 불은 쇠를 녹이니 화극금|火克金|입니다. 쇠로 만든 도끼로 나무를 베니 금극목|金克木|입니다.

    오행설은 《주역》이나 음양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역》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것이 송대 주자|周子|가 음양이 오행을 낳는 것으로까지 연결시켰습니다. 이렇게 발전하다보니 나중에는 오행과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래 표를 보시지요.

    하늘 아래 오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가 ‘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여 움직일 행|行|을 쓰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행이 신체 기관과 연결되면 그것이 곧 한의학으로 발전합니다. 천간과 지지, 방위 개념과 어울려 점술로도 발전합니다. 초기 자연과학적 성격의 오행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만큼 오행 사상은 우리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일 이름이 왜 일, 월, 화, 수, 목, 금, 토인지, 오행을 모르면 전혀 알 수 없는 명칭입니다.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 오성|五星|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와 달과 별을 일월성신(日月星辰)이라 부릅니다. 일|日|은 해, 월|月|은 달, 성|星|은 별입니다. 신|辰|은 별자리입니다. 별자리 중에서 28개 별자리, 즉 28 수|宿|를 말합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천체가 있지만, 이중에서 해와 달이 가장 크고 빛나기 때문에 일월|日月|이라 따로 부릅니다. 나머지 수많은 별들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5개의 별을 오성|五星|이라고 하는데, 움직인다는 의미로 행성|行星|이라 불렀습니다. 이 별들이 바로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다른 행성이 있지만, 망원경이 없던 때라 다른 별들은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해는 밝은 낮을 주관하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고, 달은 어두운 밤을 주관하는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어느 날 해와 달이 만나 다섯 개의 별을 낳았는데, 이들 이름이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입니다. 화성은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수성은 조용한 어머니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목성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금성은 아버지를 좀 더 많이 닮았습니다. 막내인 토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정확하게 반반씩 물려받았습니다.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을 제외한 나머지 별들은 너무 많아 따로따로 이름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서남북 4방으로 눈에 잘 띄는 별자리 7개씩을 각각 수|宿|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별자리는 4 곱하기 7 해서 모두 28 수|宿|가 생긴 것입니다.

    * 내일, 드디어 <주역> 마지막 편입니다. ^^

    [주역14] 꼴값을 알아야 – 삼재, 사상

    Posted on : 2006-09-20 | By : SON BYOUNGMOK | In : 동양고전 이야기, 손병목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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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한 수, 3

    양의|兩儀|가 사상|四象|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한의학에서 ‘사상체질’이라고 할 때의 그 ‘사상’인데, 사상은 조금 후에 다루기로 하죠. 편의상 4보다 빠른 3의 수를 가진 삼재|三才|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재는 천|天|, 지|地|, 인|人|을 말합니다. 팔괘는 세 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위가 하늘이요, 중간이 사람이고, 아래가 땅이라고 했습니다. 6효로 이루어진 대성괘에서는 위로부터 각각 2개씩 묶어 하늘, 사람, 땅으로 구분합니다. 괘를 삼재로써 풀이하는데, 괘가 처음에 만들어질 때 이런 뜻을 담고 있었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대에 3이라는 숫자를 발견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원시인들은 아주 추상적 개념인 수|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 해와 달, 남자와 여자 등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들이 거의 이원적인 요소로 되어 있으므로 하나와 둘은 쉽게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물체에서 나아가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인 개념까지도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어 3이 된다는 것은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3이라는 숫자는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3의 개념을 파악했을 것입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물인 하늘과 땅에 인간을 참여시킨 개념입니다.

    고대의 문헌을 보면 3이라는 수는 다수의 뜻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이 셋 이상 있으면 중|衆|이라 했고 짐승 세 마리 이상을 군|群|이라 했습니다. 또한 3은 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끝이라는 것은 곧 완전한 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 올 때 몇 사람을 데리고 왔나요? 바로 바람, 구름, 비의 삼신을 참모로 삼고, 3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내려왔습니다. 환웅이 하늘의 아들이라는 징표로 가져왔다는 천부인|天符印|도 세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부여 금와왕의 큰아들 대소를 포함해 일곱 왕자와 신하들의 시기를 받던 주몽이 화를 피해 남쪽 졸본부여 땅으로 내려와 그곳 왕의 딸이었던 소서노와 결혼하여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이때 그를 따라와 건국을 도운 사람은 오리, 마리, 협부 등 세 사람이었습니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천지인 자판을 이용해서 보냅니다. 한글은 발음기관과 천지인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천지인을 뜻하는 삼재는 그 뜻을 더욱 확대하여 상․중․하를 나타내기도 하고, 처음-중간-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흔히 나이가 들면 하초|下焦|가 부실해진다고 하는데, 이때 하초는 삼초|三焦| 중의 하나로 비뇨 생식 기능과 배설 기능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신화, 전설, 민담은 ‘3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 사람 또는 세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3은 신성한 수이며 완전한 수라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서양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삼신일체니 삼위일체니 하는 생각은 여러 민족의 공통된 사고였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삼신 개념이 있습니다. 아기를 점지하고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세 명의 신을 말합니다. 그 모습이 할머니 같다고 하여 삼신할머니로 불립니다.

    이처럼 3은 다수, 완전한 수, 신성한 수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생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음양(2)의 조화로 새로운 결과물(1)이 생기면 그것이 바로 3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즉 자연에서 사람이 나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자식을 낳는 등 3은 음양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꼴값하려면 넷은 있어야

    사상|四象|은 ‘넉 사’에 ‘모양 상’, 즉 네 가지 모양을 말합니다. 익히 들어온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말하는 태양인,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이라고 할 때의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을 사상이라 말합니다.

    상|象|은 모양입니다. 태극은 태초의 아무 것도 나뉘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음양은 대대|待對| 관계를 말합니다. 자연 속에 사람에 대한 인식, 즉 자기에 대한 인식을 삼재|三才|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형상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수준입니다. 사상|四象|으로 분화하여야 드디어 모양을 드러냅니다.

    드러난 모양을 보고 사람들은 그 속에 담긴 이치를 깨닫습니다. 드러난 모양이 ‘꼴’입니다. 그 모양에 담긴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 ‘꼴값’하는 것입니다. 꼴값을 보고 약을 달리 써야 한다는 것이 이제마의 사상의학입니다.

    태양|太陽|은 양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위로 모두 양인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태음|太陰|은 음이 음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소음|少陰|은 양이 음으로 분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에 양(−)이 있고 위에 음(󰁌)이 있습니다. 반대로 음에서 양으로 분화한 것이 소양|少陽|입니다.

    양의|兩儀|, 즉 음양은 하나의 효로 표현합니다. 사상은 두 개의 효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효를 겹치면 팔괘가 됩니다. 꼴값은 사상에 드러나 있고, 이를 확대한 팔괘에 세상 모든 이치가 걸려 있다고 하여 ‘걸 괘|卦|’자를 써서 팔괘라고 합니다. 팔괘는 앞서 많이 말씀드렸으니 따로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종합하자면,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습니다. 이를 <계사전>에서 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보시기 바랍니다.

    [주역13] 달도 차면 기운다 – 태극에서 음양까지

    Posted on : 2006-09-19 | By : SON BYOUNGMOK | In : 동양고전 이야기, 손병목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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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와 주역

    지금까지 <주역>에 대해 난삽하게 썼습니다. 너무나도 어렵다고들 하니 시작할 때 흥미라도 끌기 위해 혈액형을 들먹이고 동전으로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역>을 본격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산이 있으니, 바로 필수 단어집을 외는 일입니다. <주역>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단어로는, 태극, 음양, 삼재, 사상, 오행, 팔괘, 육십사괘, 괘사, 효사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역>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주역>이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씌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행사상은 초기 <주역>의 해석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주역>을 해설한 십익 어디에도 오행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음양이 오행을 낳는 것으로 이론화된 것은 주자|周子|의 공이 컸습니다. 주자는 11세기 송대의 사람입니다.

    괘는 문자가 있기 전에 만들어진 기호입니다. 양과 음을 나타내는 기호를 겹쳐 괘를 만들었습니다. 전설의 인물인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문자가 생긴 이후에 그 괘를 문자로 설명한 것이 괘사입니다. 나중에 그 괘를 뜯어서 육효 하나하나를 설명한 것이 효사입니다. 여기에 철학적 성격이 농후한 십익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를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왕필, 정이천, 주자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역>은 발전되고 또는 덧칠되었습니다.

    따라서 유의하셔야 할 것은, 지금부터 설명 드리는 개념이 먼저 있고 난 후에 <주역>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역>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런 개념들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마치 <주역>이 시|詩|라면 이러한 개념들은 시를 설명하기 위한 시 이론 용어들과도 같습니다. 시를 설명하려면 운율과 심상, 감정과 생각을 찾아내고, 이를 위해 시어와 행, 연, 운율을 분석합니다. 운율에는 내재율과 외형률이 있고, 심상에는 시각적 심상과 청각적, 후각적, 미각적, 촉각적, 공감각적 심상 등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를 이론적으로 갈기갈기 찢어 분석하고 나면, 정작 시는 사라지고 이론만 남습니다. <주역>을 지나치게 이론적 틀에 맞춰 분석해도 마찬가지 결과만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후대에 덧칠된 이론을 걷어내고 태초의 <주역>만 쏙 빼내어 읽을 까닭은 없습니다. 태초의 김치에는 고춧가루가 없었다고 해서 희멀건 김치만 먹을 이유가 없듯이 말입니다. 신라시대 때부터 김치가 있었으나 고추는 18세기에 와서야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고춧가루 없는 김치를 상상하기 힘들 듯, 선후관계가 어찌됐든 이제 음양오행 이론을 떠난 <주역> 해석은 상상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김치와 <주역>의 근원을 따져 태초의 모습을 밝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목적이 삶의 지혜를 얻고 사유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것이라면 굳이 애써 그 근원부터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춧가루가 듬뿍 뿌려진 18세기 이후의 김치 맛을 음미하듯, 많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체계화된 눈으로 <주역>을 읽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달도 차면 기운다 – 태극에서 음양까지

    <주역> <계사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그대로 풀어 쓰면, 역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씌어있기는 한데 태극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주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만 태극을 1이라고 한다면, 1에서 2가 생기고, 2에서 4가 생겼으며, 4에서 8이 생겼다는 수 개념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고대의 문헌에서 태극이라는 단어는 <장자>와 <주역>만 있습니다. <주역> <계사전>은 공자가 썼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후대 진, 한의 유학자들이 도가와 음양가의 사상을 수용하여 지은 것이라 추측됩니다. 따라서 <장자>에 나오는 태극 개념이 먼저인데, 여기서 태극은 ‘지극히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도|道|를 설명하기 위한 수식어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태극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은 송대에 이르러서야 체계화됩니다. 송대의 유학자 주렴계(1,017~1,013)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 곧 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말했습니다. 무극과 태극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무극이 곧 태극이라는 뜻입니다. 무극은 끝도 없고 중심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둥근 원 그 자체입니다. 숫자로 표현하자면 0에 해당됩니다. 이에 반해 태극은 둥근 원에 처음과 끝을 나타내는 선이 하나 그어져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선을 좌우로 해서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이 생기는데, 이는 곧 태극에서 음양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극을 숫자로 나타내면 2가 만들어지기 전의 1의 상태입니다.

    태극에서 양의|兩儀|가 생겼습니다. 양의는 ‘둘 양|兩|’, ‘거동 의|儀|’, 즉 두 개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름 아닌 음|陰|과 양|陽|을 말합니다. 음과 양은 대대|待對|의 개념입니다. 대립|對立|이라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대립|對立|은 마주 서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격투기를 하기 전에 마주 서있는 긴장 상태와 같습니다. 따라서 대립은 의견이나 처지가 서로 반대되어 부딪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가 싸워 이겨야 해결이 될 것 같은 뉘앙스입니다. 반면 대대|待對|는 기다리면서 마주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대의 개념입니다만 싸워 이겨야 결판이 난다는 뉘앙스는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오길 간절히 기다린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양이 바로 그러합니다. 음양|陰陽|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면, 두 글 자 모두 좌측에 언덕 부가 있습니다. 언덕을 기준으로 햇빛이 비치는 곳이 양이고 그렇지 않은 곳이 음입니다. 햇빛이 비치는 곳이 있으니 비치지 않는 곳이 있는 법입니다. 남녀, 상하, 일월, 천지, 좌우 등의 개념도 대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반대 개념들 뿐만 아니라 대대|待對|의 관계에 있는 모든 것을 일컬어 음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주역>에서는 음효(- -)와 양효(一)의 기호로 표시한 것입니다.

    <주역>에서 대대의 논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대는 곧 ‘관계’를 나타냅니다. 서로 대립하여 눈도 마주치기 싫은 상태가 아니라, 상대방이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와 남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은 내가 있기 위한 전제가 됩니다. 상호의존적인 관계, 이것이 바로 음양으로 표현되는 대대의 관계입니다.

    <주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대의 관계를 말합니다. 게다가 <주역>에서 영원한 양도, 영원한 음도 없습니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변하고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됩니다. 따라서 극에 달한 양은 음과 마찬가지이고, 극에 달한 음은 양과 마찬가지입니다.

    건괘의 제6효는 항룡유회|亢龍有悔|입니다. ‘지나친 용이니 후회가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1효에서 5효까지는 물속에 잠긴 용이 땅으로 오르고 다시 하늘까지 오르는 성장 발전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6효, 즉 마지막에 이르러, 지나치게 되면 후회가 있으리라고 주의를 줍니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변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주역>에서 절대적으로 좋은 괘도, 절대적으로 나쁜 괘도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달도 차면 기울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 <주역>은 겸손과 절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주역12]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Posted on : 2006-09-14 | By : SON BYOUNGMOK | In : 동양고전 이야기, 손병목의 독서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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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철학은 ‘변화’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서양철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은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영원한’ 그 무엇을 찾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허무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우주의 영원한 그 무엇을 찾다가 자연 또는 본성(physis)을 탐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를 이루는 본질적인 그 무엇을 찾았는데, 그것을 탈레스는 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했습니다. 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물질이 아니라 수|數|를 사유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이렇듯 초기 그리스 철학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영원한 그 무엇, 즉 영원한 ‘존재’를 찾았습니다. 이들에게 ‘변화’는 ‘무상함’ 그 자체일 뿐이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부정은 곧 ‘제논의 아포리아’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중에 제논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운동 그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이를 제논의 아포리아(aporia)라고 합니다. 아포리아는 그리스어로 ‘방법이 없다,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몇 개의 아포리아가 있는데, 그 중에 ‘날아가는 화살 아포리아’를 살펴보죠.
    화살이 날아갑니다. 이건 엄연한 실재입니다. 그러나 제논의 눈에 이것은 모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관찰했다고 치자. 그러나 우리가 보는 그 찰나에 화살은 어느 지점에 정지해 있다. 따라서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실은 모든 정지된 지점의 집합에 불과하다.

    선뜻 이해가 되나요? 그의 논리에 의하면 아무리 감각적으로 분명하게 느끼는 운동이 있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순간순간을 촬영한 사진의 연속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고 깊게 사유한 그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 수 있겠지만, 사유의 엄격한 논리에 오히려 현실을 묻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에 결국은 움직임(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헤겔이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
    “운동이란 한 장소에 있으면서 동시에 거기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운동 속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운동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운동 그 자체가 현존하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운동’을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도 그 의미는 통합니다.

    <주역>은 ‘변화’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이런 변화 그 자체를 도라 일컫는다고 씌어있습니다.
    아래 문장은 우리가 흔히 ‘궁하면 통한다’는 말의 원형입니다.

    역,궁즉변,변즉통,통즉구 |易窮則變變則通通則久|
    역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변화에 통달하면 막힘이 없으므로 오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위 말들은 <주역> 십익 중의 하나인 <계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계사전>은 <주역> 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즉 <주역> 연구 논문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계사전>의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주역은 곧 변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변화 자체에 대한 인정 또는 변화에 대한 긍정, 저는 이것을 동양적 사고의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주역>은 주나라의 ‘역’입니다. 예전에는 <주역> 외에도 몇 가지 ‘역’이 있었지만, 현재 전해 내려오는 것은 <주역>밖에 없습니다.
    역|易|이라는 글자는 일|日|과 물|勿|로 이루어져 있고, ‘쉽다’ ‘바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易|이라는 글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마뱀의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日은 도마뱀의 머리이고, 勿은 다리입니다. 도마뱀이 이리저리 쉽게 옮겨 다니므로 ‘쉽다’ 또는 ‘바뀌다’는 뜻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日을 해로 보고, 勿을 도마뱀 껍질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마뱀 껍질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입니다.
    햇볕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모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日이 해이고, 勿은 햇살이 비치는 모양입니다. 흐렸다가 개였다가 자주 반복되니까 ‘변하다’는 뜻이 생겼다고 합니다.
    勿자는 원래 ‘깃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극의 전투 장면 중에 병졸들이 깃발을 들고 뛰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그 깃발의 모양이 그려지나요? 옛날의 깃발은 끝이 세 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 모양이 바로 勿의 모양입니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 거기서 ‘변하다’는 뜻이 파생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데, <주역>의 역|易|은 ‘변하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변한다는 의미로 보자면 도마뱀보다 카멜레온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도마뱀과 카멜레온은 친척쯤 되는 것 같으니 그냥 이해하기 쉽게 <주역>의 역|易|자를 보면 카멜레온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
    지금까지 <주역>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주역>에 대한 이야기는 않고 주변 이야기만 한 듯합니다. 저의 <주역> 이해 능력이 다소 모자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역>을 그 자체로 해석하는 우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입니다.
    철학을 공부할 때 철학사를 무시한 채 철학자의 논리 그 자체만을 논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는 우주의 원질|原質|을 물이라 했고 아낙시메데스는 공기라고 했는데, 이것만으로 그들의 사고 수준이 천박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들은 그 당시에 우주의 원질을 찾으려고 노력했는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화에서 로고스로, 변화하는 현실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고자 했던 시대적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 이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철학을 철학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존하는 <주역> 그 자체를 직역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역>의 성립 과정을 도외시하면, 단순히 길흉을 점치는 점술서로 여기거나, 처음부터 아주 체계적이고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었던 신비스러운 책으로 여기게 됩니다. 마치 아주 먼 옛날 외계인이 미개한 지구인들에게 남기고 간 비서|秘書|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까지 <주역>의 성립 배경을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주역을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이론적인 근거인 태극과 음양, 삼재, 사상, 오행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지금의 눈으로 <주역>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하면서 이 연재를 맺고자 합니다. 고전을 읽는 가장 큰 목적은 무엇보다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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